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드워드 8세 (문단 편집) === 퇴위 이후 === 퇴위 직후인 1936년 12월 12일, [[영국 추밀원]]의 즉위 위원회 회의에서 [[조지 6세]]는 에드워드 8세에게 '윈저 공작'이라는 작위를 주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이듬해 3월 8일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에드워드를 왕실 공작(Royal Dukes)으로 만들어 [[영국 하원]] 선거에 출마하거나 [[영국 귀족원|상원]]에 출석해 정치적인 발언을 할 수 없도록 하기위한 조치였다. '''즉, 에드워드를 고위 왕족으로 만들어 정치 참여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킨 것이다.'''[* 후술할 친나치 성향이나 인종차별 경향, 그 둘과는 별개로도 개인적으로 매우 안 좋은 인품 덕에 조지 6세의 이러한 조치는 결정적으로 신의 한 수였다. ] 1937년 6월 [[프랑스]]에서 [[월리스 심프슨|심프슨 부인]]과 결혼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보우스 라이언 왕비의 강력한 반대로 심프슨은 Her Royal Highness(전하)의 칭호와 왕족으로서의 혜택은 받지 못했다. 그저 남편의 작위에 따라 윈저 공작부인(Duchess of Windsor)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시대에는 왕족이 배우자감으로 이혼 경력이 있는 사람을 들일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7년 10월 [[나치 독일]]을 순회하는데, 이러한 배경에 있어서 에드워드 8세는 책임과 의무가 크게 따르는 국왕의 자리보다는 왕세자 시절처럼 즐기며 살고 싶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중 앞에서의 인기를 누리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월리스 심프슨|심프슨 부인]]에게도 왕비처럼 환대받게 해주고자 독일을 방문했다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32&aid=0002617285&sid1=001|심프슨 부인이 나치의 스파이였으며, 에드워드 8세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히틀러와 내통했다는 설]]이 있다. [[월리스 심프슨|심프슨 부인]]의 정체는 2002년 공개된 [[FBI]] 보고서를 통해 밝혀졌다고 하는데 이는 불확실한 의혹이다. 심프슨 부인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보고서가 있기는 하나 확실하지 않다. 다만 여러 남자를 만나 이로 인해 낙태를 하여 아이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문란한 생활을 즐겼고, 만났던 남자들 중 파시스트 성향이 있는 친나치 인물들도 있었다. 특히 에드워드 8세가 프랑스에 연락관으로 복무할 때도 이런 나치 인물들과 연락을 주고 받았기에 나치의 스파이 의혹과 에드워드의 친나치 성향과 반역죄로 처형당해도 할 말 없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에 어느정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하는 의혹이 당시에도 사그러들지 않았다. 이러한 의혹은 미국 FBI 뿐 아니라 영국정부도 인지하고 있었는데 영국 공영방송국인 [[영국방송공사|BBC]][* 참고로 BBC는 에드워드 8세의 아버지 조지 5세로부터 칙허장을 받아 만들어진 영국공영방송사다.]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인 '에드워드 8세 영국의 나치 왕'에서도 언급이 된다. 1940년 7월 7일에 작성된 영국 정보기관의 첩보에 따르면, 독일은 윈저 공작 부부의 협조를 기대하며, 공작부인은 어떻게 해서든 왕비가 되고자 한다며 독일은 그녀와 협상 중이다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어 독일은 윈저 공작이 이끄는 반대정부를 제안하고, 독일은 [[영국 본토 항공전|런던 공격]] 중 조지 왕이 퇴위하리라 본다라고 보고했다. 이러한 가상 계획은 실제로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왕실은 크게 부담을 느꼈다고 한다. 이러한 첩보에 대해 에드워드 8세는 계속해서 부인했다. 1940년에 윈저 공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연락을 담당하는 연락장교로 복무중이었는데 독일 외교관과 통화중 실수로 독일측에 영국의 전략을 누설해서 처칠을 불안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나치 독일이 프랑스 파리를 침공하자 영국군과 같이 후퇴하지 않고 심프슨 부인과 여행간다는 이유로 모든 짐을 싸서 프랑스 남부 비아리츠를 경유해서 나치에 협력적인 스페인으로 도망가버렸다. 결국 분노에 찬 처칠의 명령으로 영국정보기관의 추적을 받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붙잡혔고 처칠과 영국 왕실의 압력으로 바하마 [[총독]]을 맡게 된다. 이 때문에 리스본에서 바로 바하마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이후 윈저 공 부부는 영국 정부, 영국 왕실의 눈 밖에 나버려 감시를 받게 되었으나 정신을 못 차리고 바하마에 미국 [[기자]]들을 불러 친나치적인 발언을 하고 나치를 지지한다고 하여 왕실과 정부로부터 완전히 외면받게 된다.[* 이런 형조차도 영국으로의 귀국을 허용하고 감싸주었다면 영국 왕실도 같은 연합국인 미국과 프랑스에 찍혀 왕실이 폐지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이런 업보가 크게 작용해 윈저공은 전쟁이 끝나도 영국에 돌아가지 못했고 남은 여생을 [[프랑스]]에서 보내게 된다.[* 이 때 바하마에서 [[시드니 존슨]]을 만나 평생의 비서로 삼는다.] 왕실의 행사 때문에 어쩌다 한번 영국 버킹엄 궁전에 들렸을 때도 왕족들이 윈저 공을 피했고 왕실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왕대비는 말할 것도 없고 필립공도 생전 그를 기피했다. 젊은 시절 그의 친구였던 [[루이 마운트배튼|마운트배튼 백작]]도 기피했었고 왕실 시종장들은 더더욱 심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역시 전 국왕에 대한 사소한 예는 갖추었지만 기왕이면 피하려 했다. [[조지 6세]]는 에드워드에게 '''"자신의 초대 없이 영국을 방문한다면 연금을 끊어버리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당시에도 왕실에서 전직 국왕은 현직 국왕의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관례를 들어 참석을 거부해 프랑스에서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대관식을 지켜봐야 했다고 한다. 에드워드는 퇴위 후 수 년이 지나면 다시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1972년]] 후두암으로 사망하고 나서야 윈저성 근처 묘지에 안치되어 영국으로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